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전기선 / 마쯔다 모토요시 


WattaGatta(왔다갔다) 나는 WattaGatta 라는 이름으로 라이프스타일․컬쳐․아트․음악․수작업․음식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동창작형 프로젝트 문화통역 편집팀을 만들고 있다. 


 얼마 전 처음 만난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 여성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문화통역인의 역할로 내가 ‘나’를 통역해보는 형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내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의 기분이나 관점이 되어 보는 경험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이 설정은 평소에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나를 돌아볼 수 있었으며, 머리 속에 떠돌던 생각들이 정리되는 계기가 되었다. 


 WattaGatta의 활동을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하고 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아이디어와 경험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지금까지 한국과 일본의 WattaGatta 활동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들, 우리가 품었던 상상들이 있기에, 한걸음 나아간 ‘지금’을 발신해 가고자 한다.


 과거에서 연결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 미래에 바라보아야 할 것은 지난 시간들 이상으로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 잘 부탁드립니다! 



 -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조선인으로 태어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조선학교를 다니면서 제일교포(자이니치)라고 불리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국가, 인종, 차별, 민족교육, 정치 등 여러 가지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특수한 환경 아래에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나는 일본에서 마이너리티, 즉 소수자임이 틀림없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조선인이며(조선인, 대한민국 국적도 북한국적도, 일본국적도 아닌 무국적 상태, 조선반도 사람이라 일컫는 말)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다. 이 국적은 16살이 되던 해에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한번 도 가보지 못했으며, 한 나라에 국민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던(경험해보지 못했던) 10대의 선택이었다. 17살에는 조선학교에서 여행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19살에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으로 나의, 우리나라에 살고자 방문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인 일본에서의 특별영주권을 유지하려면 2년에 한 번은 일본으로 돌아와야 했다.


 21살에는 홍대에서 Bar를 운영하며 한국의 문화에 흡수되어 살고 있었는데, 나는 여전히 소수자일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Bar의 손님과 대화를 즐기고 있었는데, 어쩌면 어렸던 나의 무지에서 말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점점 그녀의 어조가 변하더니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당신의 일본 억양을 싫어해, 차라리 한국말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교포들은 전쟁 때 우리나라를 버리고 도망친 사람들이라 싫어” 


물론 주변에서 나를 도와주고 이해하는 사람들과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어느 부분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나는, 한국에 가면(돌아간다고 하는 감각이 아니다) 조금 더 편해지고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아- 네에.” 뿐이었다. 

 무언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국에 왔던 내 자신의 철없음에 혐오감마저 일어났다. 


국가 혹은 국적, 나와 상대방에게 얼룩져 있는 이런 나라의 개념과 국민의식이란 무엇일까 라고 하는 의문점은 그 시절 나에게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런 질문의 끝을 물고 늘어질 때는 어떤 공포감도 엄습해 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18년 이상 일본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일본국적을 가진 친구가 없었던 나를 돌아보며, 너무나 의식적으로 조선인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충격적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의 생활을 통해 나는 내 나름대로 답을 얻었다. 무의식적으로 어딘가에 연결되어 안정된 소속감을 찾고자 했던 나는 결국 어디에 있어도 ‘나’ 혼자였다. 

혼자라는, 어렵게 얻은 대답 앞에서 이상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그동안의 복잡하고 두려웠던 상황을 지나 내가 서서히 1명의 인간으로, 개인으로 돌아오는 정신적 신체적 매커니즘의 감각은 지금도 선명하게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랄 만큼 기분이 자유로워졌다. 나는 아직 만나본적 없는 나를 찾으러 왔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조선인도 아닌 ‘나’를 확인하기 위해서. 


 한국을 떠나 영국과 유럽, 호주, 동남아시아 등의 조금 긴 여행을 하고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왔다. 24살이 되고 있었다. 

 가장 오래 머물렀던 런던에서 처음으로 함께 생활했던 친구들은 런던에서 활동하는 일본인 밴드 ‘맨’ 일본어와 영어로 소통을 했다. 두 번째 하우스메이트는 한국인, 한국어와 영어로 소통했다. 유럽에서는 일본인 학교의 어린이 축구팀에서 자원봉사도 하게 되었다.

 나는 세계 여행을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정체성을 필요에 따라 꺼내 사용하며 이렇게 국가라는 틀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감을 갖게 되었다. 

 나에게 처음 일본에서 일본인 친구가 생긴 것도 귀국 후, 최근 몇 년의 이야기이다. 일본에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제 ‘국적’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피와 살로 끈끈이 연결되어 작동했고, 매력을 느낄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의 삶은 점점 다른 궤도로 변화해 갔다. 일본과 한국을 오가면서도 세계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느낄 수 있었고 관계도 확장되어 갔다.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상상하면 명확한 답을 내릴 수는 없었지만, ‘국가’라는 개념을 떠나, 이런 연결감과 파장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고, 다양한 문화들의 경계에 서서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 WattaGatta의 시작. 


 www.wattagatta.com 


 한국과 일본을 오고 가며, 여러 가지 경계를 넘는 라이프스타일․컬쳐․아트․음악․수작업․음식 등을 중심으로 한 공동창작형 프로젝트 문화통역 편집팀의 활동을 통해서 재미난 기획과 코디로의 고민을 이어왔다. 



 【무의식과 뿌리】 


 내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무의식 감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가지는 무의식적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부터 계속되고 있는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룰이나, 시스템 그리고 개념 안에 갑작스럽게 낳아지는 감각, 집합적 무의식이라든가 선택적 무의식이었다. 

 그것은 가족을 포함해 자신의 주위가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의 모양 틀 같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혼자서는 그 형(틀) 안(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이나 표현을 만들어 내기가 어려운 것이 어느 세계에서나 현실일 것이다. 나에게도 숨참을 느끼는 매일이 확실히 있었다. 


 눈앞에 나타나는 것들을 편견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면, 그곳에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큰 문화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역사의 뿌리가 넓고 깊게 퍼져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그 뿌리를 가능한 뽑아 보거나, 혹은 흙을 파서 더듬어 가보는 것이 중요한 것임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뿌리의 깊이나 넓이는 파보지 않는 한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고, 내가 느끼고 감각하는 뿌리의 깊이는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나의 뿌리의 영역을 넓혀가고, 또 내 주변 사람들의 뿌리의 영역까지 포함시키면 그 범위는 더 더 커다랗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느낀 감정과 경험으로부터 모두를 인식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발생하는 것, 존재하는 것 자체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계속해서 의식할 필요가 있고, 단순하게 눈앞에 있는 감정과 감각만을 따른다면 후퇴하는 세계로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있다. 


지금도 문제의 근본을 뒤돌아보지 않고 무의식 그대로 표면적인 대회가 되풀이 되는 것으로, 새로운 문화의 숨결을 느끼는 기회로부터 멀어지거나, 보수적인 독자성을 강화하는 상태를 만들어 버릴 때가 있다. 

 이 생각은 더 깊숙한 부분의 여러 가지 각도나 입장부터 문제점이 섞여있게 보인다.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서 뿌리가 서로 엉켜버려 나의 주변에서도 세대에 관계없이 풀리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나 상황을 포함해서 새로운 대화의 기회야말로 ‘지금’을 사는 문화편집자로서 액션을 해나가야 할 부분일 것이다. 

 문화의 중간에 서서 중개의 역할을 하고, 각각의 배경을 언어가 아닌 것으로도 포함하여 통역해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 변화가 눈에 보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라며 결의를 새롭게 하고 있었던 한가운데의 코로나19 상황. 


 최근 몇 년간 나라를 넘어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경험을 공유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WattaGatta팀 이지만 올해 예정하고 있었던 몇 가지의 프로젝트가 시기 미정으로 되어버렸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해서 라고 표현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20년이 지나면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겠다는 생각도, 40년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30년 정도 걸릴 것 같다는 현상(사상)이 어! 여기 1년으로 한 번에 변화하겠다는 부분들도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 안에서 100년 전이나,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하며 눈앞에 있는 어떤 것들을 나의 감각으로 편집해가는 것 보다, 각자의 살아온 내력이나 뿌리와는 관계없어 보이면서도 실제로 개인들이 깊게 관계되는 현상(사상)으로부터 태어나는 창조물이나 언어가 경계를 넘어 다음세대를 만드는 이노베이션의 파편이 된다고 생각이 들어서 지금이야말로 WattaGatta활동을 멈추지 말고 적극적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무의식적으로, 집단적으로 누군가가 그리는 문화나 역사와 손을 맞잡는 것에도 그 배경이나 뿌리를 아는 것은 필수불가결 하다. 그러나 그 전제를 염두 해서 볼지 아닐지는 큰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믿어 왔던 것들에 의문을 갖기 시작할 때, 시공간의 삐뚤어짐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지금 세상에서도 ‘이렇겠다’ 하는 감각의 전제가 무너져가기 시작하고 있다.


 덧붙여서 지금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모두와 마찬가지로 일이나 프로젝트가 멈추어있는 상황이다. 어느 나라의 국민으로 정의되기 어려운 나에게는 지원책도 분명치 않아 다시 한 번 나라는 존재의 월경감을 오싹오싹 느끼는 매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감정도 포함해서 일상으로부터 만들어지는 이노베이션의 기회를 만들어 가면서 온라인으로도 많은 관계성을 이어가고 싶다. 


 앞으로도 다양한 WattaGatta의 메시지를 발신해 가고 싶습니다.

 각자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관계되는 당신도 온라인 인터뷰 혹은 여러 가지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 등으로 게스트로 초대될 예정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Special Thanks : yamakura ayumi(Sync board Inc.)




僕はどこの国の人なのか


( 全 基善/chon kison/松田 基善 マツダ モトヨシ )

WattaGatta(ワッタガッタ)とは韓国語で行ったり来たりの意味。僕はこの名前でLifeStyle・Culture・Art・音楽・食・ものづくりなどを中心としたプロジェクト共創型の文化通訳編集チームを作っている。

今回、僕のおいたちを全く知らない、「日本で生まれた日本の女性」からインタビューしてもらいながら文化通訳人である僕が僕自身の通訳をお願いする形で共作の文章を作ってみた。なぜなら、これから僕が対話していく事柄に対しても、相手の気持ちになってみること自体とても大切なことだと感じたから。案の定、この設定によって僕の気がついていなかった僕のことがたくさん浮き彫りになった。これらの気づきを文章にまとめてみました。

これからは、今まで以上にそんなきっかけを生み出していく側になろうと思う。新しい経験を様々な人たちと共有すべくWattaGattaの活動を通してご縁の出来た人々と共に、日韓両国の、繋げていきたい【今】を発信していきたい。 過去からつながっているものをポジティブに理解できれば、未来に託すべきことを今まで以上に自由に創造できるはずと信じ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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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という国で生まれ、【朝鮮人】として朝鮮学校に幼稚園から高校まで通い、日本国内において「在日」と呼ばれる少数民族として育った。人種差別、民族教育・政治や国など、様々なアイデンティティクライシスに囲まれた特殊環境下、日本国内では完全にマイノリティに違いない。学生時代は北朝鮮訪問も経験、その後、実は19歳で生まれて初めて韓国を訪れる。現在の国籍はと言われたら、16歳の時に「自分で選んだ」韓国国籍だ。
一度も行ったことのない国の人になるという選択を何も知らない10代の頃に決めたのだった。19歳からの3年間は、自分で決めた自分の国である韓国で暮らし、生まれ故郷の日本に戻るのは2年に一度。(なぜなら2年に一度日本に戻らなければ、特別永住権をもっていたとしても、在留許可の効力が切れ再入国が難しくなってしまうから。)21歳の頃には韓国で自身の経営するbarを持つほど韓国の街に馴染んでいた僕だったが、それでも生活のあらゆるところで、自分という人間は、韓国においてもマイノリティであるということに心の中でショックを受けることも多かった。おそらくだけど、そんなことを考えなくともいいぐらい、大切に守られた、小さな小さな在日コミュニティーの中で、18年間を生きて来たということなのだろう。

21歳の頃、とあるおばさんが僕のバーにお客さんとして来た。カウンターに座り、話をし始め、最初は興味津々話を聞いていたのだが、僕もまだよくわからないことも多く、余計なことを喋ってしまったのかもしれない。徐々に彼女の口調が変化し、最終的にはこう言われた。

「あなた、日本から来たってバレるから韓国語しゃべらないほうがいいわよ」

「在日は戦争時代に、この国を捨てて逃げた人たちだから嫌い。」

もちろん、僕の出会った周りの韓国人はそんな人ばかりではないが、朝鮮人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ーを少しでも持っていた僕は、韓国に行く(戻るという感覚ではない)と何か少しでも楽にな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期待を、まだその当時は持っていた。

えっ、あー…、はい。

その時、おばさんに返せた言葉はこれだけ。これしか言えなかった。

自分自身も在日朝鮮を一つの国、アイデンティティとして捉えていたのに、韓国に行けば何かが解決するだろうと思っていた認識の低さに対する嫌悪感さえ迫ってきた。国って、国籍ってなに、自分や他人に染みついている国の概念とは国民意識っていったいなんなんだろうかという疑問は、どんどん大きくなっていった。そんな疑問を言葉にしてしまうことや考えてしまうことの小さな恐怖も抱えながら。考えてみれば、日本で生まれ育ち、18年以上日本で暮らしたにもかかわらず、高校を卒業するまで、まともに日本国籍の友達がいなかった事、自分が意識的にも対外的にも【朝鮮人】として日本で長く住んでいたという事にもあらためて気がつき、衝撃を受けた。

日本と韓国、二つの国での暮らしの経験を経て、自分なりに一つの答えに行き着いた。

ある一定の何かを信じていた僕は結局、どこにいても「僕でしかない」のだ。

僕でしかないという当たり前のようで難しい答えを前に不思議な開放感に包まれながら、集合的心理状況から徐々に1人の人間としての「個」に戻っていくという、精神と身体のあの感覚は、今でも鮮明に覚えている。僕はびっくりするほど気持ちが自由になり、まだ見たことない自分を探しに二つの国を出た。日本人でも、韓国人でも、朝鮮人でもない自分を確認するために。

イギリス、オーストラリア、ヨーロッパや東南アジアなど、少し長い旅のあと、家族のいる日本に戻った。24歳になっていた。一番長くいたロンドンで、一緒に暮らしていたのは日本人のバンドマン。彼らとのコミュニケーション言語は日本語と英語だった。その次のルームシェアメイトは韓国人。その人とは韓国語と英語で話した。ヨーロッパでは日本人学校で子供達を相手にサッカーチームでボランティアをしたりもした。世界に飛び出した僕は、気がつけば自身の持っているアイデンティティや使える言語を使い、同じようにどこの国の人ともいえないような環境下の人たちと自然と繋がることができていた。実は僕に日本で「日本人の友達」が出来たのも、帰国してからの話。ここ数年の話なのだ。日本に戻った頃には、すっかり国籍という境界をポジティブに捉えていた。それは、世界中に友達と思える人がいたからだろう。

その後も、無意識的な同族感覚に操られるような社会には魅力を感じない日々は続き。そんな思想自体が生き方を変化させていった。日本や韓国だけを行き来していても、世界のどこかにいたような多様極まりない人間関係はどんどん広がっていった。じゃあ、具体的にこの先自分はどんな世界で生きていきたいのかのかって考えた時に、もちろん明確な答えなんてなかったけれど、僕がこれだけたくさんの人と繋がっていったみたいに、いまを見つめながらアイデンティティについて、一緒に考えてみようよって意味も込めて、異なる文化の間に立ってみる役目をかって出たのが【WattaGatta】の始まり。

www.wattagatta.com

日韓を行き来し、様々な境界を越えLifeStyle・Culture・Art・音楽・食・ものづくりなどを中心としたプロジェクト共創型の編集チームの活動を通して、いろんな企画やコーディネートをただひたすら悩みながら、なんとか続けてこれ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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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意識】と【根っこ】

そんな僕が幼い頃から当たり前のように持っていた『無意識的感覚』については、もう1度ちゃんと考えていかないといけないと思っている。

僕が持つ『無意識的感覚』というのはずっとずっと昔から続いている、自分では気付かないルールや、システムそして、概念の中にいきなり産み落とされる感覚のこと。集合的無意識とかcollective unconscious。それは家族を含めた自分の周囲が、生まれながらに持っている心の型のようなものとも言えるかもしれない。そして、なかなか一人ではその「型」の中から、新しい価値観や表現を生み出すことは出来ないのがどこの世界でも現実としてある状況だろう。僕にも息苦しさを感じる日々が確かにあった。

ただ、目の前の事を固定概念なく素直に見つめてみると、そこには自分が考えている以上に大きな文化が存在している事や、歴史の「根」のようなものが、広く深く土の中を這っている事に、気付かされる。自分の経験上、新たな社会的価値や創造的未来、文化をみいだしていく為にはその根っこを出来る限り引っこ抜いてみたり掘って辿ってみる事が大事な事じゃないかなと思ったりしている。根っこの深さは計り知れない世界だし、自分が感じ取れる根の深さは一部分の深さでしかない事もわかっている。自分以外の人の道を辿り、その広さも含めれば、もっともっと範囲はでかい。

だからこそ、自分だけの力で実際感じた体感や体験から全てを認識しようとするのは危険だと思っている。

出来事自体がどこから来たのかを意識し続ける必要があるし、この先、単純に目の前にある、感情や感覚だけを信じていては後退していくだけの世界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危機感もある。

今もなお、問題の「根本」を省みることもなく、無意識的意識のままに表面的な対話が繰り返されることによって、そもそも新たな文化の息吹を感じる機会から遠くなってしまったり、保守的な独自性を強める状態を生み出してしまうこともある。

僕からいえば、それらはもっと深度のある話で、様々な角度や立場からの問題点が混ざり合っているようにも思う。

見えない部分で、根が絡み合ってしまい、周りでも世代関係なしに解けない状態が長く続いている。このような人々や状況を踏まえ、新たな対話の機会こそ、「今」を生きる文化編集者として、アクションをおこしていくべき部分であるのだろう。何かの間に立ち、それぞれの背景を言語ではないものも含め通訳していくのだ。とはいえ、いざ取り組もうとすれば、変化を日常の中で感じられるまでは時間かかるぞ。と決意を新たにしていた矢先の、コロナ禍状態。

ここ数年間、国を越えて人に会いに行く事、経験を共有することを大事にしていたWattaGattaですが、当然、今年予定していたいくつかのプロジェクトも実施時期は未定となってしまっています。コロナによってというかなんというか、あと20年経ったら人の意識は変わるかなと思っていた事も、このままだと40年はかかりそうな気がしたり、あと30年後くらいの話かなと思っていた事が、あれ?ここ1年で一気に変わりそうだなって事まで出て来た。

そういった意味では、今の現状から考える行動として、僕のアイデンティティから捉えると、朝鮮における日本統治時代からの100年や、これから先の10年間を踏まえ、目の前にある繋げるべき物事を僕なりにどう編集していくのかを考えるほうがよりリアルで、それぞれの生い立ちや根っことは関係のないように見えながらも、実際は個別に深く関係する事象から生まれる創造物や言葉などの表現が、境界を越え、次世代を作るイノベーションのかけらになると思っていて、今こそ続けて来た活動を止めてはいけない思いが強まっています。

無意識的、集団的に誰かの思い描く文化や歴史と手を取り合うことにも、その背景や根っこの部分を知ることは必要不可欠です。しかし、その前提を俯瞰して見ることが出来るかどうかは大きなポイントだとも思うのです。信じて来たことを疑問に思い始めるときなんて、何かしら時空の歪みの中にいるような感覚もあるものだし、まさに今、世間では「こうであるだろう」という前提が崩れ始めている。ちなみにですが、コロナ禍状態の最中、皆さんと同じように仕事やプロジェクトがストップしてしまっている状況です。ですが在外国民として、どこの国の民とも定義されづらい僕には、国からの支援なども複雑で、あらためて、自分という存在の越境感をひしひしと感じる日々です。

とはいえ、そんな想いも含め、日常から生み出されるイノベーションの機会を膨らませながら、オンラインでもたくさんの関係性を繋げていきたいです。

活動を通して関わる素敵な方々も対話のゲストとしてお呼びしたり、オンラインでのインタビューや関係する様々な文化活動の紹介なども記事にしていく予定です。

どうぞ応援、宜しくお願いします。

Special Thanks:yamakura ayumi(Sync board Inc.)

Watta Gatta(ワッタガッタ)

日韓を行き来し様々な境界を越えながら、LifeStyle・Culture・Art・音楽・食・ものづくりなどを中心とした プロジェクト共創型の編集チーム『왔다갔다 ワッタガッタ』。 

日韓両国のメンバーと共に、 文化通訳、コーディネーター兼、オーガナイザーとして 文化的アプローチを展開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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